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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사변 60주년에 붙여            

                                      전 TBC  TV , PD 이정웅씨



아~ 잊으랴…….

"아버지는 그날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고전하고 있는 우리 미 24사단을 독려하고 후퇴 작전 중에 큰 전과를 올린 우리 사단에 대한 부대 표창과 미국 정부가 저에게 수여한 은성무공훈장을 제 가슴에 직접 달아주시려고 짚 차로 달려오시다가 의정부와 문산 간의 어느 도로에서 후퇴중인 한국군 트럭에 부딪쳐 현장에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계속되는 추위와 끝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려 전 전선이 계속 패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모처럼 아군이 큰 승리를 했고 그 승리의 주인공이 아들이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크리스마스 이틀 전인 1951년 12월 23일 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며칠전 맥아더 사령관은 미국 정부에 아버님의 대장 진급을 상신해 놓았더군요. ∙∙∙∙∙∙∙ 이렇게 해서 우리 부자간의 한국에서의 첫 만남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불 독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아버지 월튼 H 워커 대장 (중장으로 전사, 사후 대장으로 추서)의 우락부락한 모습과는 달리 멋진 미 육군 정장에 내개의 별이 반짝이는 바나나 모자를 쓴 훤칠하고 잘생긴 아들  S 워커 미육군예비역 대장은 알링턴 미 국립묘지의 아버지 무덤에 한참이나 거수경례를 한 뒤 눈물을 글썽이며 30년 전, TBC-TV 6. 25 30주년 다큐멘터리 제작팀과의 인터뷰를 이어갔다.

"이틀 뒤 나는 도쿄의 UN군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불려갔습니다. 사령관이 제게 말씀하시더군요.

워커 대위! 아버님의 전사를 진심으로 애도한다. 월튼 워커 대장은 정말 훌륭한 군인이었다. 그의 죽음은 우리 미군은 물론 미국의 커다란 손실이다. 귀관에게 고 월튼 워커 대장의 유해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임무를 맡긴다. 나는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각하, 그것은 안 됩니다. 저는 일선의 보병 중대장입니다. 그리고 지금 저희부대는 후퇴중입니다. 후퇴작전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하다는 것을 각하는 잘 아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부하들은 목숨을 건 위험에 노출되어 악전고투하고 있습니다. 지금 중대장이 바뀌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 중대에 제가 없으면 안 됩니다. 고 월튼 워커대장의 유해는 의전 부대에 맡기십시오. 각하의 휘하에는 반드시 의전 부대가 있습니다. 저는 전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미 문을 향해 걸어 나가던 맥아더 사령관이 뒤돌아서더니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것은 명령이야 ∙∙∙∙∙∙∙그리고는 방을 나가버렸습니다∙∙∙∙∙∙∙ 군인이 명령을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버님의 유해를 가슴에 안고 이곳 알링턴까지 와서 바로 이 자리에 안장 했습니다…. 예상했던 것처럼 저는 이미 워싱턴의 육군본부로 발령이 나 있었습니다.…저는 지금, 그때 맥아더 장군이 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이해는 합니다. 사랑하는 부하와 그 아들을 한 전선에서 한꺼번에 죽이기가 싫었겠죠. 그러나 결코 그 결정에 찬성하지는 않습니다. 명령이라 어쩔 수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군인이 부하를 위험한 전장에 남겨놓고, 치열하게 전쟁 중인 한국을 떠나왔다는 생각이 지금도 가슴을 무겁게 합니다. ∙∙∙∙∙∙∙

그러나 그가 결코 한국을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었다.

초대 주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고 월튼 워커 대장과 함께 최초의 미군 父子 大將(4 star)이며 미 육군 최연소 대장 진급자였던 전도유망했던 워커가 젊은 나이에 예편된 것은 바로 한국 때문 이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불화로 카터가 주한 미군을 철군하려고 했을 때 한국에서는 주한 미국 참모장인 싱그러브 소장이 반대했다가 예편되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미 육군의 엘리트중에서도 엘리트이며 차기 참모총장이나 NATO군 사령관으로 유력하던 위커 대장이 카터에게 반대를 했고 결국 예편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월튼 워커 대장에 대해서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이 또 있다.

아버지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교통사로로 사망한 의정부 문산 간의 도로가 바로 얼마 전 미군이 탱크 훈련 중 미선과 효순 이라는 두 소녀를 치어 죽게 한 바로 그 도로이며 사고지점도 거의 같다는 사실이다.

그뿐 아니라 워커 미 8군 사령관의 짚 차를 운전한 한국인 운전병과 짚 차와 부딪힌 한국군 트럭 운전병을 이 승만 대통령이 사형시키려 하자 미군 참모들이 적극 만류하여 사형을 면하게 해주고 대신 가벼운 징역형으로 감형케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의정부와 문산 간의 같은 길에서 난 교통사고!

1951년 미 8군 사령관을 죽게 한 한국 병사를 미군과 미국은 용서해 주었는데 2002년 훈련 중에 두 소녀를 과실로 죽게 한 미군 탱크병을, 아니 미군과 미국 전체를 싸잡아서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증오하고 저주하며 촛불을 켜들고 한국을 떠나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나라에 많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이보다 앞서 1950년 8월, 대전을 사수하라는 워커 8군 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탱크를 앞세워 밀려오는 적을 보병만으로 막아야 했던 불리한 전황 속에서 어떻게든지 대전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소 3∙인치 로켓포를 발사하여 적의 T-34 탱크 한 대를 직접 폭파시키면서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리던 미24사단 사단장 월리암 딘 소장이 부대와 떨어져 홀로 36일 동안 산속을 헤매다가 한국인 농부의 밀고로 북한군에게 잡혀 3년 동안의 포로생활을 하였다는 사실, 포로생활에서 풀려나자 그의 조국 미국은 사단장이 직접 적 탱크와 맞닥트려 싸울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급박한 상황과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리고 3년 동안의 포로생활 중 보여준 미군 장성으로서의 군인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미국이 줄 수 있는 최고 훈장을 수여했지만 내가 한국에서 사단장으로서 한 행위는 나무 훈장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적 탱크를 격파한 것도 어느 하사관도 할 수 있는 일 이었다 고 부끄러워하며 은둔했던 그가 단돈 5 달라에 자기를 밀고해서 미군 장성으로서의 인생을 포로라는 치욕으로 마치게 한 그 농부가 5년형을 받아 복역 중이라는 것을 알고는 분연히 일어나 무지한 농민이 살기 위해서 한 행동이니 감형해줄 것을 한국 정부에 간청하여 기어코 출옥시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딘 장군의 포로생활은 북괴군이 그를 심문할 때 통역을 했던 민간인 이 규현이 탈출 귀순하여 진술함으로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이 규현씨는 후에 중앙일보 사장과 문공부 장관을 역임했다)

만약 외국에 파견한 한국군 사단장이 그 나라 민간인의 밀고로 전투 중에 포로가 되고 군사령관이 전사하는 경우를 당했다면 우리 국민과 나라는 어떻게 했을까?

이런 것을 한번 생각이라도 해본 사람들이 있기나 한가? 지극히 의심스럽다.



<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머니 저는 지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機首에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後尾에는 기관총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지금 한국에서 싸우고 계십니다. 드디어 저도 미력한 힘이나마 아버님에게 힘을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애인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이 편지는 워커 장군의 후임이었던 릿지웨이 장군이 맥아더 장군이 해임됨에 따라 UN군 총사령관으로 영전한 뒤 그 후임으로 부임한 벤프리트 미 8군사령관의 아들 지미 밴프리트 2세 공군 중위가 이제 막 해외 근무를 마쳤음으로 한국전에 참여할 의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원해서 아버지가 사령관으로 있는 한국전에 참여하면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리고 그 것이 마지막 편지였다.

1952년 4월 2일. 이 훌륭한 군인은 압록강 남쪽의 순천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새벽 3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더와 접촉한 후 표적을 향해서 날아가더니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겼다.

즉시 수색작전이 시작된 것은 물론이다.

4월 4일 아침 10시 30분 8군 사령관 밴프리트는 미 제5공군사령관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지미 밴프리트 2세 중위가 폭격비행 중 실종 되었고 지금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고 한다.

"지미 벤프리트 2세 중위에 대한 수색작업을 즉시 중단하라. 적지에서의 수색작전은 너무 무모하다." 라고 ∙∙∙∙∙∙∙아버지가 아들 구출작전을 무모하다고 중지시킨 것이다.

이것은 인접 한국군 부대장으로서 회의에 참석했던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의 증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