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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비천함을 사랑하는 것
      글 : 김용은 수녀님 / 살레시오 수녀회     
        
      “겸손(humility)은 굴욕((humiliation)이 아니다. 
      이는 단지 창조주의 헤아릴 수 없는 넘치는 풍요로움과 견주어 
      자신의 것이 얼마나 미약한지를 알아보고 인정하는 것이다.
      즉 겸손은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아가는 덕이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그 아이가 너 만나고 싶대”
      “그 아이?”
      “너 어렸을 때 늘 함께 붙어 다녔잖아”
       
      순간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이 희미하게 스쳐 지나갔습니다. 
      바로 옆집에 살던 아이. 
      목소리나 하는 짓이 꼭 남자 같던 아이였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놀이에서도 다른 아이들에게 
      결코 지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그 동네를 떠났고, 
      이후 난 그 아이를 거의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아이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데 선뜻 
      내 입에서 보고 싶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을까 언니로부터 
      그 아이에 대한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친구가 누군가에게 살해 당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순간 놀라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날 보고 싶다고 하던 그 아이, 
      그런데 내키지 않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던 나, 
      죄책감에 억눌려 숨이 막혀 오는듯했습니다. 
      그 아이는 내 과거이며 자아의 일부 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 아이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공부도 못하고 놀기만 했던 머슴아이 같던 그 아이의 천함이 
      곧 나의 천함임을 인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내 내면의 비천함을 사랑하는 연습을 많이 했다면 
      난 분명 그 아이를 기꺼이 만나 손을 잡아 주었을 것입니다. 
       
      살레시오 성인은 말합니다. 
      “다 해진 옷으로 추위에 떠는 수도자를 보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그 고통에 동정을 보내며 
      그가 입은 옷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똑같이 떨어지고 해진 옷으로 벌벌 떨며 거니는 
      가난한 노동자나 걸인에게는 냉정한 시선으로 멸시와 조소를 보낸다.”
       
      수도자인 나는 해진 옷을 입고 걸인들 속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멋진 옷을 입은 사람들 틈에서 명성을 얻어 내고자 한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명성을 거부해야 한다고 살레시오 성인은 말합니다. 
      똑같이 낡은 옷인데 수도자가 입으면 명성을 받고 
      걸인이 입으면 굴욕을 얻습니다. 
      고통에도 천한 것이 있고 명예스러운 것이 있다고 합니다. 
       
      명예스런 고통은 참아 받으면서 자부심을 얻고, 
      천한 고통은 모욕과 비웃음을 얻습니다. 
      눈을 내리뜨지만 마음은 자만에 가득 차고, 
      꼴찌 자리에 가려고 서둘러 움직이지만 마음은 무겁습니다. 
      이것 역시 명성을 얻어내려는 제스처에 불과할 뿐 
      결코 진정한 겸손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살레시오 성인은 겸손은 그야말로 ‘굴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덕이라고 합니다. 
      성모님은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라고 
      기뻐 용약하여 노래합니다. 
      바로‘비천함’을 사랑하는 성모님이야말로 진정한 겸손의 모델인 것입니다. 
       
      살레시오 성인은 ‘비천’이란 그저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미소함’이며 ‘겸손’이란 이 ‘비천함’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정말 완벽한 겸손은 기쁘고 적극적으로 
      이 ‘비천함’을 인식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살레시오 성인은 명성을 바람직하지 않지만 
      우리 삶의 장식으로 인정합니다. 
      초보자들을 위해서는 더욱더 필요한 장식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명성 때문에 신경이 과민하고 세심과 불안으로 지낸다면 
      오히려 반대의 결과가 나온다고 경고합니다.
       
      이런 사람은 큰 강에 허술한 나무로 다리를 만들어서 
      비만 오면 불안해하는 것과 같이 자신이 없고 나약하여 
      늘 불안해 하면서 잃어버린 명성을 찾아 헤매는 것과 같습니다.
      살레시오 성인은 비천함에서 오는 굴욕을 
      겸손으로 품어 안으라고 합니다. 
      이는 자기 억압이 아닙니다. 
      솟구치는 굴욕을 억지로 막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약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욕을 보고 모함을 당할 때 반박하고 대드는 것보다 
      침묵을 지키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악어는 무서워하는 사람만 해치는데, 
      비방도 과민하게 반응하는 이에게는 독처럼 번집니다. 
       
      비난과 모욕을 기도와 침묵으로 대응한다면 
      굴욕의 독소는 스스로 소멸됩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자신에게 오는 굴욕을 품어 안고, 
      더 나아가서는 적극적으로 기쁘게 이를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참소중한 당신 2007년 9월호》   
        순교자 성월~